메뉴 건너뛰기

XEDITION

지역특징

"농촌과 도시가 함께 자라고 행복해지도록 진상농협이 함께 합니다"

지역특징

1. 진상면의 유래

진상면은 광양군 1읍 8면중의 하나로서 東國與地勝覽에 따르면 蟾居浦라 하였고 윗쪽에 蟾居驛을 두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895년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수어천에 있던 '숭어쏘나루터'(청암리와 금이리 사이에 있었다 함)를 중심으로 윗쪽을 津上面, 아래쪽을 津下面이라 하였다.(津下面은 후에 月浦面과 함께 津月面이 됨) 津上面은 일명 上道面으로 津下面은 下道面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로써 津上面은 蟾居, 數洞, 龍溪, 新川, 外錦, 內錦, 上梨, 下梨, 場基, 飛村, 坪村, 炭峙, 竹林, 新田, 熊洞, 星斗, 新黃, 舊黃, 智溪, 外回, 內回, 於峙, 元堂, 倉村, 平亭, 芳洞, 旨郞, 桃源, 中陽, 靑龍, 木果, 立岩, 의 32개 마을을 관할하였다.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蟾居, 錦梨, 飛坪, 黃竹, 於峙, 旨元, 靑岩의 7개 리로 개편되었다. 동쪽은 津月面과 多鴨面, 서쪽은 玉龍面, 서남쪽은 玉谷面, 북쪽은 多鴨面에 접해 있다. 1983년 2월 15일 진월면 진정리 삼정마을이 진상면 청암리로 편입되었다.

 

가. 錦梨里

1798년쯤부터 금연촌(錦蓮村)으로 불리어 오다가 1912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外錦, 內錦, 上梨, 下梨를 병합하여 上錦과 梨川의 이름을 따서 錦梨里라 하였다.

금이를 자연마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梨川 마을
서나무정 북쪽에 있는 마을로 1683년에 晋州 姜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천은 흔히‘배천'으로 불리는데 이 이름은 약 350년 전에 이 마을에 있었던 白川寺라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白川寺라는 암자 때문에 마을이름이‘백천'이되었는데 발음상 편의에 의해‘배천'으로 변했다가 이를 한자로 표시하게 되자 배 梨字가 붙어 梨川이 된 것이다.

배천마을 은 위에 있는‘웃배천'과 아래에 있는‘아랫배천'으로 나뉘는데 아랫마을에는 蟾居浦를 끼고 서는‘蟾舊場터'가 있었다.

이곳은 1943년 水魚川 제방의 개수전에는 벼 500석을 싣는 風船이 출입할수 있는 浦口였다.

 

(2) 內錦 마을
원래 錦村마을을 이루는 동네였다. 錦村에는 내금, 외금, 상금이 있었다.

錦村은 옛날‘무근터골'이라고 하였고 朝鮮初에 魚府院君(咸從魚氏)이 이곳에 유배되어 지냈다고 하여‘錦蓮洞'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玉錦界內의 큰 암석에는‘咸從魚氏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內錦 마을은 上錦마을 남쪽에 있으며‘內洞'이라고도 부른다.

1580년경 晋州鄭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을 이름에‘錦'자가 있는 것은 마을의 지형이 玉女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선초기, 마을에 있던‘금연촌'이라는 못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내금마을 뒷산의‘까막등'은 옛날에 큰 물난리가 있어서 마을은 물론 산 전체가 물에 잠기고 까마귀 한 마리가 앉은 정도의 땅만 남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3) 外錦 마을
內錦 바깥쪽에 있는 바깥금촌‘外洞'이라고도 불린다.

이 錦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앞에 쓴 內錦마을의 그것과 같다. 1580년경에 晋陽 鄭씨가 처음 들어왔다.

 

(4) 上錦 마을
1920년 이후에 설치된 마을로 錦村의 위에 위치한다 하여 上錦이라 하였다.

행정상 內錦마을에 속해있고 10여호가 살고 있다. 晋陽 鄭씨의 齊室이 있다.

 

나. 飛坪里

본래 광양군 진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飛村, 坪村, 炭峙里를 병합하여 飛村과 坪村의 이름을 따서 飛坪里라 하였다.

弁韓때 玉龍으 奈川縣城과 骨若面 中軍里의 중군현지와 더불어 이곳에 飛邑址가 있었다는 설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곳에서는 특히 儒林이 많이 배출되었고 따라서 유교사상도 뿌리 깊었다.

의병과 일제하의 애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특히 비평리의 동남쪽에 해발 300m가량의 산이 있는데 현재도 연대 미상의 산성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佛岩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성은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한결과 서기 600년경의 백제 시대에 쌓은성으로 확인되었다.

 

(1) 飛村 마을
원래는 지금의 수어호안에 자리잡고 있던 마을로 1974년 수어댐의 건설로 산위로 이주하였다.

이 마을은 1530년경에 昌原 黃씨인 後憲이 들어와서 지금의 수몰된 날몰(비촌)에서 400여년 동안 17대가 살아왔다.

마을 이름을 飛村이라 한 것은 黃竹里에 신라시대때 세워진 黃龍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黃龍이 飛村에 날아와 앉았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飛村은‘날아갈 마을'(날몰)로도 해석되어 왔는데 1974년 8월 여천 공업단지 용수원으로 水魚湖가 飛村일대에 형성되고 마을이 산중턱으로 옮겨가자 사람들은 마을이 날아간다는 해석이 적중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촌에서는 黃夏錫, 黃勉基 등의 志士가 배출되었고 진사 黃夏錫은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 이 행적을 기리는 積善碑가 서 있다.

청계당, 운고정, 鼓岩書室(龍岡積舍)의 유적지가 있었으나 수몰로 인하여 현재는 황죽리에 옮겨져 있다.

 

(2) 炭峙 마을
비촌 동쪽에 있는 마을로 1623년경 利川 徐씨 원숙공파인 인보에 의하여 마을이 이루어졌다.

炭峙라는 이름은 유래를 알 수 없으나 지명으로 보아 炭이 매장된 것이 아닐가 추측되고 있다.

1970년대에 실제로 炭이 출토되었다는데 효율성을 측정한 결과 열량이 낮아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炭이 출토되었던 佛岩山에는 아주 오랜 산성이 있는데 흔히 佛岩山城이라 불린다.

둘레가 500m에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이 성은 동쪽의 산정과 서쪽의 산마루를 장축으로 하여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북쪽에는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안쪽에 큰 샘이 있어 농사에도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3) 坪村 마을
비촌 남쪽 들에 있던 마을로 언제, 누구에 의해 마을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

뒷산에서 쇠를 캐내어 솥 등을 만들던 鐵店이 있었다 해서 ‘점골 또는 점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 蟾居里

본래 진상면의 지역으로서 蟾居驛이 있었으므로 蟾居驛,‘驛村'또는‘蟾居'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蟾居, 數洞, 龍溪, 場基를 병합, 蟾居里라 하였다.

진상면의 소재지로 경찰지서, 각급학교, 우체국, 시장 등이 있다. 섬거리를 자연부락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蟾居 마을

三政峰, 鷹峰, 三角峰이 병풍처럼 둘러진 형태가 두꺼비 같다고 하여 蟾居浦로 이름하여 오다가 그 뒤 里로 개칭되었다.

면사무소에서 서북방으로 0.3㎞의 지점에 위치한다.

약 700년 전에 許씨, 張씨가 정착하였다고 口傳되어 오며 1700년대 초부터 규모있는 亭子馱, 東學亂때 亂軍을 가매장했다는 假葬골馱, 長者골馱이 있다.

蟾居驛은 驛吏 94명, 노비 5명, 驛屯沓 160두락의 규모였는데 역의 위치는 지금의 섬거마을 회관자리였다.

마을 서남편에 위치한 삼정봉은 풍수지리학으로 세 정승이 이곳에서 태어날 것을 예견하고 있다 하는데 한 정승은 이미 나왔으며(법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정객 嚴祥燮을 가리킴) 두 정승이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마을의 서북방에 위치한 三角峰에는 때를 알 수 없으나 둘레 300여m의 축성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중심부에는 烽火台가 있었던 흔적이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불교를 숭상하던 시절에 승려를 송별하였다는 마을앞의 別僧台(音借되어 이곳 주위을 '변대거리' 혹은 '별신대거리'로 부른다)가 있다.

비롯한 5개소에 언제부터인지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자정에 洞祭를 모셔오고 있다.

또한 지금부터 약 70년전 참봉 張周煥이 洞長에 있으면서 洞有林 150정보를 조성하였다.

그후 이 수익금으로 洞有沓 1,782평을 마련하여 이제 이 수익금으로 洞祭를 모시는 경비와 이장의 이정세를 충당하여 군내에서 洞財가 가장 많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 섬거마을과 두꺼비

섬진강(蟾津江)은 본래 모래내. 다사강(多沙江). 두치강(豆置江)이었던 것이 고려초부터 섬진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 우왕 11년(1385년)에 왜구가 강하구에 침입했을 때 광양땅 섬거(蟾居)에 살던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떼지어 몰려와 울부짖자 이에 놀란 왜구들이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다.

(1999. 3. 7. 제막된 다압면 섬진에 있는 섬진강 유래비문에서)

 

(2) 龍溪 마을

新市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1780년경에 全州 李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내에서 용이 나왔다 하여 龍溪라 이름 하였다.

용계 뒷산은 닭이 알을 품었다하여 풍수지리학상 龍溪包卵의 형국이라 한다.

 

(3) 新市 마을

숲넘 동쪽에 있는 마을로 1910년경 密陽 박씨가 처음 정착하였으며 ‘蟾舊場터'에서 시장이 옮겨오면서 새장터(新市)라 불리웠다.

시장이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인데 이전의 마을 형태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시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규모도 따라서 커졌으며 3일과 8일에는 섬거장이 서고 있다.

 

라. 於峙里

어치리는 사료에 의하면 1789년쯤부터 어치촌이었으며 후에 지계와 회두가 이에 병합되었다.

어치리의 자연마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於峙 마을
느재라는 고개에 있는 마을로 1600년경에 載寧 이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곳을‘느재'라 한 것은 마을 앞 고개의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늘인재'가‘느재'로 줄임말이 된 것이고 후에 늘 어(於)와 재 치(峙)를 써서 어치라 한 것이다.

여기서 바라보이는 억불봉과 인방골 널벙바위 주위에 1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2) 智溪 마을
어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곡부 孔씨가 처음정착하였다 하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알 수 없다.

智溪는 옛날 황룡사에 부속된 인방골 암자의 중들이 빨래할 깨끗한 물을 찾아 다니다 이곳의 냇물이 제일 깨끗하다 하여 냇물의 이름을‘智溪'라 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흔히‘지제비'라고 불린다.
지계의 천살고지에는 龍沼라는 沼가 있는데 이곳은 옛부터 용이 살았다 한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기때문에 가뭄이 심할때면 광양 향교에서 나와 기우제를 지냈다.

몇년전까지도 심한 가뭄이 계속될 때에는 농촌지도소 등이 주관하여 기우제를 거행하였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3) 回頭 마을
회두는 外回와 內回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비교적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다.

회두마을은 1830년경 능성 구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한다. 이 마을의 원이름은‘왼데미'로서 황룡사의 승려들이 多鴨으로 가려면 智溪를 거쳐 이곳을 지나게 되는 데 이곳이 길의 왼쪽이 된다하여‘왼데미'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內回를 안쪽에 있는 왼데미라는 뜻에서‘안왼데미'外回를 바깥쪽에 있는 왼데미라는 뜻에서‘밖왼데미'또는 그냥‘왼데미'라 하였다.

回頭마을의 백운산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반란사건과 6.25때에는 지계마을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소개되었었다.

 

마. 智元里

1789년까지는 이지역을 지랑촌(旨郞村)으로 불리워 오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元堂, 倉村, 平亭, 芳洞, 智郞을 병합하여 智郞과 元堂의 이름을 따서 智元里라 하였다. 지원리의 자연마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智郞 마을
대밭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흔히‘몰랑물'이라 부른다.

1480년경에 木川 馬씨가 처음정착하였다. 몰랑몰은 마을이 몰랑(마루)에 있다하여 붙여진 것으로‘몰'은 마을을 뜻한다.

마을이 말의 형국이라‘말랑몰'이라 했던 것이 변하여‘몰랑몰'이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몰랑몰을 어떤 연유로‘智郞'이라 했는지 알 수 없다. 흑자는 智郞이 冒郞의 誤字가 아닌가 여기기도 한다.
지랑마을 앞 조산에 있는 정자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인데 봄에 잎이 한꺼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여러차례로 나누어 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2) 倉村 마을
정명골 동쪽에 있는마을로 1780년경에 순흥 安씨에 의해 마을이 이루어졌다.

倉村이라는 이름은 倉庫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 마을에는 조선 초기부터 稅米를 저장하는 倉이 있어서‘창마을(창몰)'또는‘倉村'이라 했다는 것이다.

倉村마을은 지세가 배(船)의 형국이라 땅을 깊이 파면 동내가 망한다는 믿음때문에 지금도 自然井이 없다.

 

(3) 平亭 마을
정명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1780년경 利川 徐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徐씨가 들어와 큰 팽나무 아래에 정자를 짓고‘팽정'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게 되자‘平亭'으로 되었다.

당시의 팽나무는 없어지고 대신 동백나무 숲이 마을 당산을 덮고 있다.

 

(4) 元堂 마을
창촌마을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풍수설에 의하면‘燕所'즉 제비집 형국이라 한때 부촌을 이루기도 하였다.

金海 金씨가 처음 정착하였다하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5) 芳洞 마을
‘방골(芳洞)'과‘대밭골'을 합쳐서 芳洞이라 하였다.

방골은 대밭골의 위에 위치하며 좌우에 산이 바람벽같이 막혀 있어 방같은 모양이라 하여 방골인데 외부에서 보면 마을의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芳洞은 房洞의 誤記이다.

 

바. 靑岩里

본래 진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桃源, 中陽, 靑龍, 木果, 立岩里를 병합하여 靑龍과 立岩의 이름을 따서 靑岩里라 하였다.

1983년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三亭마을이 청암리로 병합되었다.

 

(1) 靑桃 마을
청도는 桃源, 靑龍, 中陽을 행정구역상 청암 1리로 하면서 붙여진 통칭이다.

中陽마을은 1660년 경 晋陽 姜씨가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동학란 당시 이곳에 姜, 朴, 梁씨가 살고 있었는데 난리중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고 마을이 年中多陽하여 살기가 좋은 곳이라 한데서 중양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마을에는‘칼바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 하나가 이를 파손하고는 그 자리에서 죽은일이 있었다 한다.

 

(2) 靑龍 마을
청암리 북쪽에 위치한다.

지형이 靑龍如意珠형국이라 하여 청룡이란 명칭이 생겼다한다.

거주 호수가 점차 줄어 현재는 6호에 불과하다.

 

(3) 桃源(園) 마을
청룡마을 아래에 있다.

桃花落地가 있다는 풍수설에 의해 마을 이름이 생겼다.

 

(4) 木果 마을
청룡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모과나무골'로도 불린다.

1650년경에 晋陽 鄭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모과나무골이란 당산에 큰 모과나무가 있어 붙여진 것이다.

마을에는 200년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晋陽 鄭씨의 일화가 전해 오는데 부친상을 당한 정씨가 3년간 시묘를 하던 중 동지달 추운날씨에 소에서 숭어를잡아 부친의 묘에 바쳐 효를 다하였다는 것이다.

정씨가 숭어를 잡았던 소를‘숭어소'라 하였는데 오늘의 수어천도 숭어소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마을에 효자 정씨의 효자문이 있었으나 日政때 유실되었다.

 

(5) 立岩 마을
중양의 남쪽에 위치한 아을로 1830년경 단양 禹씨가 처음 들어왔다.

입암 마을은 뒤쪽에 우뚝 선 바위가 있다 하여‘선바우골'로도 불리우며 이마을에는 선돌(고인돌)이 지금도 남아있어 선돌 즉 입암마을이라 부르게 되지 않았나 본다.

 

(6) 三亭 마을
원래 津月面 관할이었으나 1983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진상면으로 병합되엇다.

1780년경 蔚山 金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마을에 큰 정자나무(팽나무)가 3그루 서 있어 三亭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바다에 생계를 의지하였으나 靑岩坪 경지정리 사업을 하면서 갈대밭을 改畓하여 지금은 부촌을 이루고 있다.

 

사. 黃竹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림, 신전, 웅동, 성두, 신황, 구황리를 병합하여 구황과 죽림의 이름을 따서 황죽리라 하였다.

황죽리를 자연부락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竹林 마을
竹田은 竹林과 新田을 행정구역상 묶은 것으로 황죽 1리에 속한다.

1540년경 裁寧 李씨가 들어와 정착했으며 竹林은 대가 워낙 많아 대숲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며 新田은 새로 개간된 밭이 있었다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2) 舊黃 마을
黃竹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黃龍寺가 있었다.

黃龍寺에는 누런 용이 살았다고 전해져 마을의 이름도‘누런이',‘황리'또는‘노룡리'로 불리웠다.

그런가하면 건너馱으로 가는 다리위(다래둠벙)에는 사금맥의 누런 바닥이 펼쳐저 있으며 일설에 黃龍負舟의 명지가 있다하여 누런이, 노런이, 노룡리, 黃里, 黃龍里로 불리워 왔다.

지금의 구황은 黃里 남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 新黃으로 불리게 되자 이에 대해 원래 있던 黃里라는 뜻으로 舊黃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구황마을은 1480년경에 들어온 남평문씨에 의해 이루어 졌다.

 

(3)신황마을
억불봉 동향 산줄기가 구황의 東川들에 머무는 곳에 黃龍負舟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고려 왕건의 도움을 받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황룡사가 크게 번창하였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과 명당을 노리는 지방 부호의 세력에 의해 몰락하게 되자 黃里의 주민들이 절터를 개간하고 하나, 둘 이사를 하여 새로운 부락이 형성되자 이 마을을 新黃으로 하고 옛 黃里를 舊黃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신황마을은 그 형국이 뜬배와 같다고 하여 2000년인 오늘까지도 샘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4) 熊洞 마을
신전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큰 산에 둘러 싸여 있다.

지세가 험하고 곰이 많다하여‘곰골'이 되었다. 한편 풍수지리학상 마을의 형국이 곰과 같다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1780년경에 曲阜 孔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다.

숭천잇고랑 어귀에 있는‘비늘바구'는 봄철에 내린 비에 의해 계곡수가 많아지면 수어천에 있던 민물고기들이 웅동천을 따라 오르다 이 계곡에서 폭포를 만나 튀어 오르면서 고기 비늘이 거의 벗어져 나가 바위에 널리게 되어 이를 두고 비늘바구라 하며 폭포와 함께 경관이 좋아 마을의 자랑거리이다.

웅동은 광양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들어와 예배당이 세워진 곳이다.

이 때문인지 이 마을에서는 故 서재화를 비롯한 6명의 목사가 배출되었다.

위로